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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예비역부사관총연합회 부사관호국영웅입니다.

 
작성일 : 19-02-03 13:59
하사 김문필 (경주)
 글쓴이 : 부총연
조회 : 14  

호국전몰용사 공훈록

김문필 (金文弼)

  • 군별 : 육군
  • 계급 : 하사
  • 군번 : 0145910
  • 전몰일자 : 1951-04-23

공훈사항

김문필 하사는 1920년 8월6일 경상북도 경주시 충효동 220번지에서 출생, 1950년 9월5일 육군에 입대하여 제6사단에서 복무하였다.
제6사단은 1948년 6월14일 충주에서 창설된 제4여단이 제6여단으로 개칭된 후 육본 일반명령 제15호(1949년 5월12일)에 의거 사단으로 승격, 창설되었다. 원주에 사령부를 둔 제6사단은 제2연대를 홍천지구에, 제7연대를 춘천지구에 배치하여, 2개 연대로 38도선 경비임무를 수행하고, 제19연대를 예비로 원주에서 임무를 수행하게 하였다.
사단은 6ㆍ25전쟁이 발발하자 춘천과 홍천 지구에서 6월30일까지 북한군 제2사단과 제12사단의 남하를 저지하면서 제19연대를 춘천지구에 투입하여 제7연대를 지원하였다.
이 후 육군본부의 명령에 따라 횡성-충주로 철수하면서 지연전을 실시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사단의 축차적인 저항으로 북한군은 자주포를 포함한 많은 인원 및 장비의 손실을 입고 춘천-홍천 축선으로의 진출이 지연되어 수도권 포위를 위해 우회기동하려던 작전계획에 큰 차질을 초래하였다.
국군의 한강방어선이 붕괴된 후인 1950년 7월5일부터 10일까지 사단은 음성 지구에서 적의 선두부대인 제15사단 제48연대를 궤멸시키는 대전과를 거둠으로써 제7연대 전 장병이 일계급 특진하는 영예를 획득하였다. 이어 이화령과 문경 지구에서는 적 제1사단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해 상주로의 진출을 차단하였고, 7월18일부터 26일까지 함창선에서 적 제1사단과 옥녀봉 및 조봉지구 전투를 실시하는 등 지연전을 전개하면서 낙동강방어선으로 철수하였다. 사단은 의성-군위-의흥선에서 약 1개월에 걸친 공방전을 벌인 후 1950년 8월30일 영천 북방의 신녕 지구에서 마지막 공세를 통해 아군 제8사단의 방어선을 돌파해 영천 동측방으로 진출하려던 적 제8사단의 침공을 성공적으로 방어하였다.
1950년 9월15일부터 반격작전으로 전환한 사단은 충주-원주를 거쳐 10월3일 춘천을 탈환하고 38도선을 돌파하였다. 사단은 이어 화천-원산-성천-순천-개천-고장을 거쳐 한ㆍ만 국경으로 진격, 패주하는 적 5,200여 명을 사살하고 10월26일 초산을 점령하여 역사적인 태극기 게양식을 거행하였다. 그러나 사단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퇴로가 차단되어 10월29일 초산으로부터 철수를 단행하면서 대동강 방어전과 순천지구 전투를 통해 적의 남진을 저지ㆍ지연하였다. 그리고 평양-수안을 거쳐 12월12일 동두천에 도착하여 제2차 38선 방어에 돌입하였으나, 12월31일 중공군의 신정공세로 안성까지 후퇴하였다.
1951년 2월8일부터 12일까지 514고지를 공격 점령한 사단은 다음날 여주-가평 방면으로의 총반격작전에 참여하여 4월6일 캔사스선을 확보하였으며, 4월22일 사창리지구에서 중공군 4개 사단과 방어전투를 전개하였다. 중공군의 제2차 춘계공세 당시 용문산 일대에 주저항선을 형성한 사단은 1951년 5월18일부터 중공군 3개 사단의 침공을 받고 3일간의 전면방어로 격퇴시키는 한편 후퇴하는 적을 추격하여 21,000여 명을 사살하고 2,500여 명을 생포하는 대전과를 거두었다.
김문필 하사는 적의 공격을 저지하면서 방어작전을 수행하던 기간 중 임무를 수행하다가 1951년 4월23일 강원도 화천지구에서 장렬히 전사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살신보국정신(殺身保國精神)을 선양하고 후세에 교훈으로 남기기 위해 국립현충원(國立顯忠院,03-2-022)에 봉안하고 있으며, 전쟁기념관 전사자 명비(번호 043-ㅊ-073)에 이름을 새겨 추모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