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비역부사관총연합회
부사관호국영웅
알림-소식
부사관호국영웅
부사관호국영웅
대한민국예비역부사관총연합회 부사관호국영웅입니다.

 
작성일 : 18-12-02 20:05
일등중사 김인규 (영동)
 글쓴이 : 부총연
조회 : 6  

호국전몰용사 공훈록

김인규 (金仁奎)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등중사
  • 군번 : 2102291
  • 전몰일자 : 1951-09-30

공훈사항

김인규 일등중사는 충북 영동군 용산면에서 출생, 1948년 6월 10일 육군에 입대하여 육본직할 제3육군병원에서 복무하였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의 기습공격을 받은 국군은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하기 위하여 미약한 병력과 장비로 용전분투하였다. 육군본부는 여러 직할부대를 동원하여 전방의 제1사단, 제6사단, 제7사단에 배속시켜 방어력을 강화하였다.
육군본부는 6월 25일 수도경비사령부 예하 제3연대를 제7사단에, 그리고 오후에는 제18연대(-1)도 추가로 배속하였으며, 제8연대마저 제6사단에 배속하여 가평지구에 투입하였다. 그리고 독립기갑연대 제1대대(장갑차)도 제1, 6, 7, 8사단에 배속되었다. 또한 서울 특별연대를 제1사단에, 전투경찰 1개 대대가 배속된 육사생도대대를 제7사단에 배속하는 한편, 포병학교 제1교도대대는 제1, 6, 7사단에, 제2교도대대는 제7사단에 배속하였다. 6월 26일 저녁에는 육본 장교연대를 의정부지구 전투사령부에 배속하여 창동지역에 배치하였다.
국군은 철수와 방어 그리고 다시 철수로 이어진 수세적인 전투만 수행하다가 일시 공격으로 전환하여 혼성대대 병력이 동두천을 탈환하고 소요산까지 진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곧 이은 북한군의 대규모 역습을 받아 의정부 방면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국군은 의정부-창동-미아리 방어선에서 육탄공격까지 감행하면서 결사적으로 저항하였으나, 전투력 열세로 수도 서울을 적에게 내어주고 한강 이남으로 철수하여 6월 28일부터 7월 4일까지 한강선 방어작전을 전개하였다.
이후 국군은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하기 위해 축차적으로 지연전을 실시하여 7월 말에는 낙동강에 이르렀다. 국군은 유엔군과 함께 낙동강 선에서 강력한 방어작전을 전개하여 북한군의 공세를 저지하였다.
1950년 9월 15일의 인천상륙작전에 이어 공세로 전환한 국군과 유엔군은 북진작전에 돌입함으로써 10월 1일 38도선을 돌파하고 북진을 계속하여 서부전선에서는 제6사단이 10월 26일 한ㆍ중 국경의 초산에 도달하였고, 동부전선에서는 수도사단이 11월 25일 청진을 점령하고 30일에는 부령까지 진격하였다.
그러나 1950년 10월 25일부터 시작된 중공군의 대규모 공세에 밀린 국군과 유엔군은 평택-제천-삼척을 연하는 선까지 철수하였으나, 제2차 반격작전을 전개하여 38도선 부근까지 진격하였다.
이후 몇 차례의 공방전이 전개되었으나 정전회담의 진행과 더불어 전선이 교착상태에 접어들자, 양측은 주요 고지를 놓고 치열한 고지쟁탈전을 전개하였다.
김인규 일등중사는 부여된 작전임무를 훌륭히 수행하며 용전분투하였으나 안타깝게도 1951년 9월 30일 장렬히 전사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살신보국정신(殺身保國精神)을 선양하고 후세에 교훈으로 남기기 위해 국립현충원(國立顯忠院,23-3-756)에 봉안하고 전쟁기념관 전사자 명비(086-ㅁ-101)에 이름을 새겨 영령을 추모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