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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9-01-20 12:28
조선의용대 광복군에 편입… 좌우 무장부대 ‘하나로’
 글쓴이 : 조경자 (122.♡.151.194)
조회 : 16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사통일

한국독립당·조선민족혁명당 분립
군도 광복군·조선의용대 각기 운영
일제 대동아전쟁 도발 등 정세 급박
중국 정부, 좌우세력 통일 강력 요구
임시정부 1942년 4월 16일 편입 의결
김원봉 광복군 부사령 겸 제1지대장에
  

조선의용대 기관지

조선의용대 기관지


한국광복군 창설로 당·정·군 체제가 확립되면서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에도 힘이 생겼다. 무장투쟁으로 독립운동의 중심이 옮겨 가면서 임시정부가 구심체가 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조선민족혁명당과 그 무장부대인 조선의용대의 태도가 크게 변화하였다. 조선민족혁명당은 그 뿌리인 의열단 이래 임시정부에 대해 불관(不關)주의 태도를 견지해 왔다. 심지어 임시정부 해소까지 주장하기도 하였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무장투쟁보다는 외교와 준비론 위주의 운동노선이 못마땅했던 것이다. 여기에 정부 주도권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권력투쟁에도 식상했기 때문이다. 의열단이 중심이 되어 임시대통령 이승만 성토문을 발표하고, 민족혁명당이 ‘이당치국’을 내세우며 임시정부 해소를 기도한 일도 여기에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중·일전쟁 이후 태도가 크게 변화하였다. 임시정부가 무장부대 편성에 힘을 쏟다가 기어코 미주동포의 재정 지원으로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자 생각이 바뀐 것이다. 중국국민당 정부의 강력한 권유와 제2차 국공합작의 영향도 크게 작용하였다.

중국 정부는 여러 경로와 방식으로 독립운동세력의 통일을 요구한 것이다. 그래서 좌우 독립운동세력을 대표하는 김구와 김원봉은 합작과 통일을 공개 천명하고, ‘7당회의’와 ‘5당회의’를 열어 정당 통일을 추진하였다. 그렇지만 좌우 정당의 대통합은 이루지 못하고, 우파 3당의 통일로 한국독립당을 창당하는 데 그쳤다. 우파 정당만의 통일체로 출범하였지만 한국독립당은 임시정부의 여당으로 강력한 버팀목이 되었다.

임시정부가 오랫동안 꿈꿔온 국군으로 한국광복군을 창설한 것도 한국독립당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도발하자 임시정부는 즉시 대일 선전포고를 발표하였다. 한국광복군이라는 무장부대를 기반으로 국제사회에 제2차 세계대전 참전을 공식적으로 선언한 것이다.

하지만 당시 중국지역 독립운동계는 좌우 세력으로 분화된 상태였고, 양대 세력은 우파 한국독립당과 좌파 조선민족혁명당으로 분립하여 있었다. 무장부대도 한국광복군과 조선의용대로 나뉘어 따로 활동하였다. 한국광복군은 임시정부의 국군으로, 조선의용대는 조선민족혁명당의 당군으로 각기 운영되었던 것이다.


조선의용대 깃발

조선의용대 깃발


더욱이 조선민족혁명당과 그 무장부대인 조선의용대는 오랜 무장투쟁의 전통을 온축해 왔기에 군사 활동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다. 김원봉을 비롯한 지도자들이 의열단 시기부터 암살·파괴 등 무장투쟁을 통한 민중직접혁명의 가시밭길을 쉼 없이 걸었던 때문이다. 구성원들도 신흥무관학교와 중국 황포군관학교를 비롯한 군관학교, 그리고 의열단이 운영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출신들이 대부분이었다.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조선민족혁명당은 좌파 연합전선체로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하고, 산하 무장부대의 결성을 모색하였다. 중국 국민정부와 여러 차례 협상한 결과 1938년 10월 초 조선의용대 지도위원회를 구성할 수 있었다. 여기에는 중국군사위원회 인사와 조선민족혁명당의 김원봉, 조선청년전위동맹의 김학무, 조선민족해방동맹의 김성숙, 조선혁명자연맹의 유자명 등이 참가하였다. 이들의 협의 결과 1938년 10월 10일 무한(武漢)에서 100여 명의 인원으로 구성된 조선의용대가 창설되었다.

처음 조선의용대는 대본부와 제1구대와 제2구대로 짜였다. 대장은 김원봉이었다. 제1구대는 조선민족혁명당 소속 청년들로 조직되었고, 박효삼이 구대장이었다. 제2구대는 조선청년전위동맹 소속 청년들로 구성되었고, 이익성이 구대장을 맡았다. 결성 직후 일제의 침략으로 무한이 함락되자 조선의용대는 몇 군데로 나뉘어 이동하였다. 대본부는 중국군사위원회를 따라 광서성 계림으로, 제1구대는 호남성 중국군 제9전구로, 제2구대는 호북성 중국군 제5전구로 옮겨 군사 활동을 전개한 것이다.

중국군사위원회와 중국군 각 전구에서 조선의용대는 선전활동을 전개하고 일본군에 맞서 직접 전투에도 참여하며 조직과 인원을 확대하였다. 1939년 겨울 제1구대를 확충하여 제1지대와 제3지대로 분리 편성한 것이다. 새로 성립한 제3지대는 김세일이 지대장을 맡았다.

제2구대는 무한이 함락되자 북상하다가 김학무의 지도를 받아 중국 5전구 소재지 노하구로 이동한 병력과 최창익을 따라 서안으로 이동한 병력으로 갈리었다. 서안으로 이동한 병력 가운데 대다수는 연안으로 들어갔다. 제2지대는 노하구로 이동하여 5전구 전투지역에서 활동한 병력들로 편성되었다.

계림으로 이동한 대본부는 각 지대의 활동을 지도하는 한편 대원 모집에 힘썼다. 윤세주는 중국국민군 포로수용소로 찾아가 한인 병사 30여 명을 찾아내 대원으로 삼았다. 부녀자들로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도 조직하였다. 이리하여 창설 당시 병력은 100여 명이었으나, 1년 뒤인 1939년에는 150여 명, 1940년에는 3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조선의용대 공작 방침

조선의용대 공작 방침


이즈음 대원들 사이에는 100만 이상의 한인 동포가 사는 만주로 이동해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하였다. 만주로 이동하는 길목이자 중국공산당 활동지역이며 최전선인 화북지역에서 일본군에 맞서 싸워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1941년 봄 조선의용대 주력 제1·2·3지대 병력 80여 명이 황하를 건너 화북 팔로군 근거지로 이동한 것도 이런 이유였다.

조선의용대 주력이 북상한 뒤 정세는 더욱 급박하게 돌아갔다. 일제는 태평양전쟁과 대동아전쟁을 도발하였고, 임시정부는 대일 선전포고를 발표한 것이다. 중국 정부의 좌우세력 통일 요구도 더욱 빗발쳤다. 군사 통일부터 하라고 성화였다.

결국 임시정부는 1942년 4월 16일 조선의용대 대본부 및 잔존 병력을 한국광복군 제1지대로 편성하였다. 5월 21일에는 김원봉을 광복군 부사령 겸 제1지대 대장으로 임명함으로써 불완전하나마 임시정부 국군인 한국광복군을 중심으로 좌우 무장부대의 통일이 이루어진 것이다. 사진=필자 제공

<김용달 한국독립운동연구소장>